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12년 정도 된다. 대학 생활은 제외하더라도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의 세월이다. 학교생활의 시작은 사회화의 과정이며 기술의 구축을 통해 사회생활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정체성 확립과 함께 몇 가지 기술과 능력을 키워 나가면서 세상에 대해 준비를 하게 된다. 12년 동안 우리 자녀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환경이 되기도 한다. 학령기 동안 아이의 생물학적 리듬은 생존 기술들을 배울 수 있는 단계를 마련한다. 믿음과 희망, 자율성과 의지력, 주도성과 목적 등과 같은 초기 자아의 힘을 마련함으로써 성인으로서의 인생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사회화 기술로 협동, 상호의존 그리고 건강한 경쟁의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아이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의 학문적인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기술들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고, 가치를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가장 좋은 배움은 건강한 자기 존중감이다. 학령기의 과업 성취는 새로운 힘과 희망에 대해 인식하게 해 주는데 이것이 '자아의 힘'이다. 학교 교과과정에 적응해서 제대로 배운다면 새로운 능력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근면하고 유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초등학교 3~4 학령기의 아이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사춘기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추상적인 사고나 사실과 모순되는 명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이상화하거나 우상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상화는 사실과 상반되는 가설을 만드는 것이다. 학령기 아이들은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며 사고 과정에 있어서는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특성은 주로 부모의 실수를 끄집어낸다거나 자기가 부모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지적 자만'은 이 시기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많은 흥미로운 현상들을 설명해 준다. 때로 이 시기의 아이들의 농담 대상은 주로 바보 같은 '어른'에 대해서다. 인지적 자만심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학령기의 아이는 즐겁고, 쾌활하고, 매력적이다. 친구들과 가까이하고 싶고 열정적이며, 배우는 데 호기심을 발동한다. 학령기에는 공부뿐만 아니라 놀 수 있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는 성장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아이들은 모방과 적응을 통해 배운다. 학령기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특성을 학교라는 장소에서 발견하고 더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라는 장소가 많은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왜 많은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학교가 지루하고 재미없고, 강압적인 곳이라고 생각할까? 이런 아이들의 생각은 학교라는 장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즉 단지 사회화 과정과 기술 습득을 위해 발전적인 자아상을 제공하는 곳으로 여기기에는 학교는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 교육을 제공하는 장소인 학교가 종종 정신적인 상처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나이에 따라 수평적으로 배정한다. 초등학교 3학년의 아이들은 대부분 10세의 아동들이다. 이는 10세의 아동이 똑같은 성숙의 단계에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무척 획일적인 발상이다. 이런 획일적인 평가와 학년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아이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학교에서는 또래들만큼 독해력이 있어야 하고, 또 다른 또래의 아이들만큼 수학을 빨리 배워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수학에서 낮은 점수를 받게 되고 아이의 수학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수학 문제를 잘 풀었다고 해서 인생의 필요한 기술을 습득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학 문제, 국어 문제가 학령기 아이들에게는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수학적 해결 능력과 국어의 독해력이 미숙한 아이에게는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 아이는 사회화 과정에서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점수 체계는 그 자체로도 불행한 제도이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암기하고 성취하도록 계속 압력을 넣는다. 이런 압력 속에 완벽주의를 요구하는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요구가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완벽주의는 절대로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이 완벽주의다. 완벽주의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중독적인 수치심을 만들어 내고 이에 따라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학령기 아이들이 수학능력에 대해 낮은 점수를 받게 되면 그들에게 커다란 아픔을 주게 된다. 열등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상처를 주게 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수학능력이 높게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문제를 야기한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최고를 지향하는 성과 중심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학교 체계 역시 역기능적이라 할 수 있다. 학령기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독특한 존재로서 대해 주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누구도 동일한 사람은 없다. 또한 이 세상에 똑같은 문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학령기의 아이들은 완벽주의 체계에 순응해야 하는 걱정과 부담 때문에 상처받는다. 사회 속에서 '성공'의 기회를 바라보며 무력하게 있다가 낙오자가 되거나 완벽주의 체계에 순응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야 하는 모순이 학령기 아이들이고 학교는 이를 제공한다. 어떤 아이들은 서툴고 미숙해 보일지 모른다. 수학능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아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아이는 없다. 그 아이들은 단지 거칠고 아직 미완성인 존재이며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 부모 세대와 기성세대의 존중과 도움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이런 의식이 학령기 아이들에게 주어진 창조성과 존귀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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